스트레스 폭발
2019.01.10 목
오늘은 마사가 쉬는 날이라 바이런과 둘이 일하는 날이다. 하... 걱정하던게 현실로 다가왔다. 역시나 바이런은 설거지따위 신경도 쓰지않고 틈만나면 폰만 본다. 이제는 내 눈치가 보이는지 자꾸만 이핑계, 저핑계를 대며 안보이는 곳에서 딴짓할 장소를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닌다. 일 시작하고 몇시간은 테브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시킨 일이 많아서 그거하느라 정신없었는데 그 사이 바이런은 계속 놀고 설거지는 쌓여갔다. 그런데 마침 테브가 그걸 본거다. 그러더니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이런에게 설거지 쌓였다고 딱 한마디한다. 정말 얄밉게도 바이런은 이제서야 알아챘다는 듯이 엄청 열정적으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늘 테브나 폴, 대리나가 있을 때만 열심히다.
테브가 퇴근을 하고 나와 바이런만 남았다. 나는 캐셔도 보고 베이커리 정리도 해야하고 설거지, 1, 2층 테이블 정리까지 하고 있는데 바이런은 커피머신 앞에만 딱 서서 커피 내리고 우유 스팀 치는 것 밖에 하지 않는다. 나는 종아리가 터져라 뛰어다니는데 자기는 무슨 벼슬인냥 1m 반경을 벗어나질 않는다. 이런 바이런의 행동에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나도 모르게 일하는 내내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갑자기 바이런이 엄청 큰 소리를 내며 물건을 집어 던지고 보란듯이 여기저기 발로 차며 성질을 부려대길래 깜짝 놀랬다. 자기도 내 태도가 불만이었나보다.
솔직히 겁날 건 없었다. 기분나쁜 표정을 숨기지 못한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뒤,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이 됬는지 바이런이 나에게 와서는 웃으며 말을 건다. 나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며, 사실 자기가 오늘 자전거를 안가져와서 버스 끊기기 전까지 마감을 끝내야하다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단다. 순간 혼란스러운 마음에 오해한 거라 기분이 풀릴뻔했지만 몇분뒤.. 바이런은 여전히 일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냥 내 몫의 일만 하고 퇴근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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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퇴근 후 스트레스를 한가득 안고 헬스장으로 가는길. 판뮤어 역에 내려서 역 입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걸어나가는데 햇빛을 등지고 나를 쳐다보며 서있는 남자가 있었다. 덩치나 형태가 블라도와 무척 닮아 있어서 걸어가면서 한참을 빤히 쳐다봤다. 블라도가 워낙 흔하게 생긴 유럽사람이라 하루에도 몇번씩 블라도 닮은 사람을 자주 보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는데 왠걸! 진짜 블라도였다ㅋㅋㅋㅋㅋ
서로가 서로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시티도 아니고 여기서 만나게 될줄이야. 안그래도 오늘 아침 블라도 생각이 났었는데 진짜 너무 반가웠다ㅠ
파푸랑가로 이사 갔다는 블라도는 여자친구와 키위 3명의 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단다. 그 집의 정원을 관리해주며 무료로 숙박을 하고 있다고 했다. 헬스장 입구까지 함께 걸으며 쉴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아쉬운 마음에 20분 동안 서서 그동안 못다한 수다를 떨었다. 블라도는 여전히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ㅋㅋ 블라도도 나와 비슷하게 5월이면 비자가 만료된다. Slovakia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에 잠깐 들러 리를 만날까 생각 중이란다. 어쩌면 블라도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포옹을 하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했다.
블라도와 이야기 나누며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줄 알았지만 런닝머신 걷는 내내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이런과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만만하게 생겨먹어가지고 무시를 당하는 걸까 생각했다. 또 크리스찬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게 맞는 걸까. 다른 썸남들과 마찬가지로 내 기대만 한껏 올려놓은 뒤 상처만 남기고 떠나는건 아닐까. 생각을 떨쳐버릴려고 뛸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런닝머신을 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헬스를 마치고 나와 운좋게 마음씨 좋은 기사아저씨를 만나 신호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보통 운동하고 집에오면 그 날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