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질랜드 생활 2018 ~ 2019/...일기

인생멘토

by noopy00 2021. 3. 24.
반응형

 나이를 먹을 수록 그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이 흘러간다는 말이있다. 10대엔 10의 속도로, 20대엔 20의 속도로.

아직 30대의 초반에 있지만 20대의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던 걸 생각하면 앞으로의 세월은 정말 눈 깜빡하면 지나가 버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매일을 기록하고있기도 하다.

 최근 카페와 다른 매장의 스시집 알바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비슷한 걸 느낀다. 5개월 간 일주일 내내 실비아파크 스시집에서 하루 종일 비슷한 일만 하며 시간을 보냈을 때는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에 반해 새로운 하루의 루틴을 보내고, 두가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매일 신경쓰고 집중하며 보내는 요즘은 매주, 매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진다.
 어릴 때는 세상의 모든것이 새롭고 배워야할 것들이 많다. 매 순간, 1분, 1초에 집중하고 모든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느라 시간이 천천히 갔었나보다. 반면 한살한살 나이를 먹어갈 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익숙해진다. 그러한 익숙함에 하루하루 의식이 죽어가고 있는 것같다. 결국 의식이 깨어있지않으면 무의식 좀비로 남은 평생을 번갯불에 콩 태워먹듯 보내버릴 것이다.

 


 월, 화 중에 ㄱㅈ쌤과 만나기로했는데 내일은 오후에 카페에 일하러 가야해서 시간이 안될 것 같아 오늘 연락했다. 하필 날씨는 비가 오고,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준비도 못했지만 모든게 완벽한 날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쌤이 연락을 받았고 교육도 30분이면 끝난단다. 급하게 어디갈지 근처를 둘러보았다. 비 때문에 신발, 양말이 다 젖었다ㅠ 오전에만 비가 오고 오후엔 그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늘 날씨는 호락호락하지않았다.

 갈만한 식당 알아본 후 쌤이 버스 내리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쌤이랑 마주쳤다. 10년만이다. 쌤은 내가 조금 어색한듯 했지만 나는 정말 반가웠다. 처음 가보는 Lula inn 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2시간동안 수다를 떨었다. 10년도 더 전에 1년 조금 안되는 기간동안 쌤은 물리치료사, 나는 접수보는 알바생으로 일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뉴질랜드라는 나라에서 만나게 될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 당시 여러 물리치료사 쌤들 중에 유독 빛이 났던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내가 지금 그때 쌤 나이보다도 많으니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건데 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1살도 늙지 않은 것 같다. 예전의 그 빛도 아직 가지고계신듯하다. 마흔이 넘으셨다니.... 믿겨지지가 않는다 ㅋㅋ 그때랑 느낌도 똑같은데.
쌤이랑 이야기나눈 시간은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그당시엔 할 수 없었던 대화들을 정말 많이 나눴다. 뉴욕에서 중고등학생 시절 7년을 보내셨고 IMF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게되면서 이것저것 꼬이는 바람에 친구들에비해 5년 정도의 시간이 뒤쳐지게되었다는것. 서울에 좋은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다 합격했지만 친한 친구가 거길 가고싶어한다는 것을 듣고 정말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고 이후 물리치료 실습생시절 xx의료원의 열정적인 교육 열의에 심장이 뛰어 들어오게되었지만 그당시 선배 선생님들의 열정은 2년만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식어버렸단다. 그렇지만 쌤은 꾸준히 악착같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되었는데 한 5년 전부터 해외의 물리치료 교육을 들으면서 이 좋은 걸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쌤이 원하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단다. 멘토가 없었기때문에 모든걸 늘 스스로 일구고 개척해나가와서 참 아쉽다는..
물리치료말고 하고싶었던 직업없었냐고 물었는데 음악, 춤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10대때는 잘 추기도하고 관심도 많았는데 부모님 눈치때문에 어쩔수없이 이쪽으로 길을 선택하게되었다고. 그쪽으로 길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단다.

병원에서 같이 일할때도 쌤한테서는 참 좋은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했었고 몇년 뒤 우연히 지하철에서 마주쳤을 때도 밝고 활기찬 얼굴로 나를 기억해주신다는게 신기하고 감사했었다. 쌤 결혼 후 카톡이나 인스타로 아이낳고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남편 만나 저렇게 살고싶다는 꿈을 꿔었다. 그랬던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아 한국도 아닌 뉴질랜드에서 만나게되다니... 나로써는 정말 영광이었다. 10년도 전인데다 그 이후 정말 많은 알바들이 그 자리를 거쳐갔을텐데 나를 기억하시는게 신기해서 물었다. 쌤이 하신 대답은 “그왜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잖아.”

xx의료원도 정말 구식이라 계급사회인걸로 알고있는데 어떻게 쌤같은 사람이 10년 넘게 일하고 계신지 궁금했다. 쌤은 처음에 조직을 바꾸려고 노력을 했었고 그게 안되면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로 자기 주변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했었단다. 그리고 현재는 선배 물리치료 선생님 한명과 후배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아예 다른 물리치료실에 떨어져서 스포츠재활 같은 걸 담당하고계신단다. 뇌졸중환자들을 담당하는 기존 치료실 쌤들과는 완전 분리가되어 최소한 쌤 치료실에서만큼은 다른 분위기를 조성하고있단다. 한마디로 쌤은 고인물이 아닌것이다.

쌤도 정말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내가 봐온 훌륭한 인격을 가진 몇몇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쌤도 본받고싶은 친구가 주변에 있었다. 무한긍정의 그 친구는 뭐든 “하면 되겠지”라고 외친단다. 힘들때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극복한단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그리고 쌤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현실에서 괴로워하며 못 벗어나고 있는 친구들에게 무한 긍정의 기운을 내뿜으며 결국 회사까지 그만두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쌤아는 동생중 한명도 쌤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찬하며 맹신했었는데 쌤 말듣고 결국 해외로 나가 자기 길을 만들어 지금은 오히려 그 동생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다니는 상태가 되었단다.

쌤을 만나고나서 정말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야지 더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기겠구나 싶었다. 쌤과 얘기하면서 느낀건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내 말의 깊은 뜻을 굳이 설명하지않아도 알아들으신다는 거였다. 나보다 훨씬 생각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겠지.
쌤을 보면서 느꼈다. 이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기엔 난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다음에 만나게될 날을 떠올리며 그때는 지금보다 더 성장한 내가 되어있어야겠다고 다짐하게된다.

반응형

'뉴질랜드 생활 2018 ~ 2019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맞이  (0) 2021.03.24
깜짝 소식  (0) 2021.03.24
일상  (0) 2021.03.23
뉴질랜드 뮤지션이랑 데이트?  (0) 2021.03.23
남섬으로 갈까...  (0) 2021.03.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