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6 금
간헐적 단식의 효과인지 최근에 먹기시작한 비타민 덕분인지 며칠째 연속 상쾌한 기분으로 이른 아침 눈이 떠진다. 곧바로 시티로 출발했다. 버스에서 내려 스시집이 있는 윈야드까지 걸어가는 동안 여유롭게 이곳저곳 구경도하고 지금 이 시간을 즐겼다.
어쩌면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행복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배꼽빠질 듯이 웃음이 나온다거나 가슴가득 벅차오르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머무르고 마음은 아주 고요하고 차분한 이러한 행복. 이렇게 조용히 혼자서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기분이다.
6년 전 처음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몇달동안 이어지는 철야 근무에 햇빛한번 제대로 쪼일 시간없이 일만 해야했던 나의 20대 후반. 하루하루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조금씩 썩어가고있었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막연히 행복만을 꿈꾸며 그렇게 버텼다. 어떤게 행복인지도 전혀 모르는 채로.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존재하는 것이기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만약 과거로 잠깐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느끼는 이 진짜 행복을 알려주고 싶다. 6년 전의 나에게. 그리고 20년 전의 나에게도.
스시집에선 별문제없이 일을 끝내고 퇴근 전 우유 스팀 두번해보고 나왔다. 이제 좀 거품 내는 방법을 알 것 같다. 왜 안되나했는데 스팀기를 최대한으로 키고 있지 않았다.^^;;
원래 카페일 시작이 5시였는데 갑자기 3시로 바뀌었다. 곧바로 카페로 갔다. 바이런이랑 그나마 좀 편해졌는데 오늘 쉬는 날이라서 아쉬웠다. 카페 일은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것 같다.
3시부터 5시까지는 시간이 정말 안간다. 아직까지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보니 언제 또 실수를 할지, 언제 또 혼날지 몰라 불안함의 연속이라 마칠 시간을 자꾸 보게되는 것 같다. 한참 일한 것 같은데 겨우 4시반이다.
5시쯤 되었을려나 테브가 밖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바이런이다. 약속이 있어 나왔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들렀단다. 그때 갑자기 좀전에 음료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던 한국여자가 내려와서는 실수로 커피를 다 쏟아버렸다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올라가서 보니 와..... 테이블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완전 난리였다. 같이 일하고 있던 마사가 친절하게도 음료를 새로 만들어줬다. 퇴근 준비하던 테브도 그 소식을 듣고는 굳은 표정으로 2층에 올라왔다. 그리곤 보는둥 마는둥 하더니 내려가버린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하나하다가 일단 화장실에서 페이퍼타올을 가져와 허둥지둥 닦았다. 이대론 안될 것 같아 밀대걸레를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갔더니 이미 테브가 밀대걸레를 내오고 있었다. 받아 들고는 한참 뒤처리하고있는데 1층에서 테브와 바이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브가 바이런에게 내가 어쩌고있는지 2층가서 한번 봐주라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바이런이 도와준 덕분에 후다닥 뒤처리를 하고 내려갈 수 있었다. 바이런은 쉬는날인데 하필 이런 타이밍에 와가지고 괜히 고생이다. 밀대걸레까지 손수 빨고있는거 내가 하겠다고했다.
바이런이 오고나니 일할 맛이 났다. 바이런은 얼마전 이곳 카페에서 정식 직원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쉬는 날인데도 엄청 열심히다. 알고보면 내가 걱정이되서 온 걸지도...
일본인 마사도 성격이 너무 좋다. 마사는 나와 거의 비슷하게 여기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 캐나다랑 호주에서 이미 워홀 생활을 하면서 카페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보다 영어도 일도 훨씬 능숙했다. 그런데 시티 백팩커스에서 생활한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내가 듣기로 백패커스라고하면 주로 여행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그러다보니 뜨네기들이 많아서 도난 사고도 많이 있다고 한다. 특히 시티에 있는 백패커스는 홈리스들도 많이 이용해서인지 냄새도 심하고 시설이 열악하다고 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여느 일본인들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다.
퇴근시간이 되니 또 너무 아쉬웠다. 지금까지는 여기 애들이 너무 좋아서 얼른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더 있고 싶었다. 테브도 그런 나를 알아채고는 더 있으려면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장난치듯이 근무수당 챙겨주는 거면 더 있겠다고 했더니 당장 카페에서 나가란다. ㅋㅋㅋ 마사랑 바이런에게 다음주에 보자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ㅎ
배가 미친듯이 고팠다. 오늘은 11시쯤 먹은 비빔면이 전부라 공복 시간이 너무 길었다. 카페 나오자마자 전에 봐뒀던 sel’s라는 피자집으로 갔다. 페페로니 피자 한조각과 캔콜라를 시켰다. 피자는 블로그에서 본대로 좀 짜긴했지만 맛있었다. 콜라는 생전처음 보는 바닐라 맛이다.
버스타러가는 길에 사야카와 그녀의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났다. 손꼭 붙잡고 저녁먹으러 가는길이란다. 이렇게 길에서 마주치니 넘 반가웠다. 오클랜드에서만 6개월 넘게 살다보니 이렇게 길가다가도 만날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다. 어떤 사람은 오클랜드가 워낙 작아서 1년 정도 살면 한다리 건너 다 알게 된단다. 그래서 입조심해야한다나... 그런데 이것도 다 한국사회 이야기라서 나와는 관계가 없을 듯 싶다.
집에 도착해서 세탁기 딱 돌려놓고 샤워하고나와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영화봐야지하는 생각에 설레는 맘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쇼파에 앉아 있는 어두운 표정의 벨라가 보인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벨라는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약속 없으면 같이 술마시러 가지않겠냐고 묻는다. 쉐인이랑은 같이 술마시기싫다고. 쉐인이랑 싸웠나보다. 어쩔 수 없이 내 계획들은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술마시러 어디갈지 물었다. 가깝게 엘러슬리에 있는 술집이나 아니면 시티로 나갈지 물었다. 벨라는 시샤하러 Jan에 가자고하더니 또 갑자기 시티로 나가잖다. 기분이 많이 나쁜가? 왜이렇게 왔다갔다 정신이 없는걸까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쉐인 일하는 회사 사무실가서 같이 마시지 않겠냐고 묻는다. 엥?
알고보니 쉐인네 회사에서 파티같은 걸 하는데 오라고 쉐인이 불렀나보다. 그치만 벨라는 그 자리가 어색하고 재미도 없고 또 벨라를 별로 맘에 안들어하는 쉐인 동료가 있어서 혼자가기엔 싫단다.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왜 그렇게 어두컴컴한 거실에 혼자 우울하게 앉아 있었는지. 사람들도 많이 오고 나는 재밌을 거라며 같이가자고 졸라댄다. 어떤 파티라는 건지 전혀 감이 안잡혔지만 이미 술마시러 가기로 다 말해 놨는데 이제와서 발뺄 수도 없고.. 벨라 기분 풀어줄 겸 같이 가기로했다. 쉬고싶었지만 새로운 사람들 사귈 수 있는 기회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살짝 걱정이 되긴했다. 내가 함께 가도 되는 자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니 쉐인이 문앞에 나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파티가 열리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분명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했는데 건물은 너무 조용했다. 미로같은 계단과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연구실 같은 큰 사무실. 사람은 쉐인 팀원 4명과 그 중 한명의 부인이 전부였다. 완.전. 뻘쭘한 상황이다.
벨라야 쉐인 부인이니까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뭔가... 여기서 뭐하는 건가.... 거기다 벨라는 뭐가 그렇게 어색한지 나보다도 더 부끄러워하며 같이 어울리길 싫어했다. 그럴수록 난 더 불편해졌다.
있는 내내 벨라는 나와만 이야기하길 원했고, 쉐인 동료들이 권하는 술과 음식을 모두 거부했다. 그렇게 한시간을 우리끼리만 속닥거리며 종이에 낙서하며 보낸것같다. 진짜 애는 애다.... 도대체 여기까지와서 뭐하는 짓인지. 내가 쉐인이었으면 이런 부인이 정말 쪽팔렸을것같다. 벨라 뿐 아니라 그런 벨라를 와이프로 둔 쉐인을 좀 낮게 볼것같았다.
아무도 말도 안걸고, 먼저 말걸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Farewell 파티였고 다들 키위인데다 일얘기뿐이어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벨라말이 맞았다. 그래서 벨라 혼자 오기싫어 나를 꼬셨던 거다. 벨라도 참 이기적인 애다. 내 입장은 전혀 고려도 안한채 이런 분위기의 자리에 데리고오다니. 내 황금같은 휴식시간을 다 빼았아버렸다ㅋ
심심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기는 싫은 벨라는 쉐인이랑 2차로 술을 더 마시러 가려고했다. 쉐인도 집에 가기싫은게 눈에 보였고 동료들과 함께 놀고싶어하는 것 같았다. 예전같았으면 그냥 이 분위기에 맞춰 함께 계속 놀았을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러고싶지가 않았다. 내 기분과 컨디션이 더 우선이었다. 물론 얘네랑 같이 놀면 재밌는 일이 더 생기겠지만 고작 술때문에 겨우 잡아 놓은 밸런스를 다 무너뜨리고싶지 않았다.
여기 온것만 해도 밸런스가 다 무너졌다. 10시가 다되어 스테이크와 소시지를 먹었지, 잠도 늦게 자지, 술까지 먹어버렸지ㅠ 제발 내일 컨디션이 좋길 바랄뿐이다.
11시가 거의 다되어 밖으로 나왔다. 벨라는 끝까지 나를 꼬셔댔다. 결국 안되니까 내일 일 마치고 자기랑 같이 와인 마셔달란다. 하........ 그놈에 술 ㅠ 아예 처음부터 못마신다고 못을 박았어야했다.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얼른 씻고 자려는데 사키에게서 문자가 왔다. 방금 집에 온것같았다. 벨라랑 쉐인 지금 시티에 있는데 갈생각있냔다. 일단 짜증부터 났다. 씻는 소리가 안들리나 ㅋㅋ 그리고 주말에도 일하는거 모르나...
일단 무시하고 잘준비 다 한 후 답을 했다. 좀전까지 같이 있다 왔다고.
벨라에게 매번 내 이야기를 한단다. 알고있다. 벨라도 나 없을땐 내 얘기 할거란거. 잊지말고 입조심하자.
지금 이순간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들이지 않은가 되새겼기에 즐기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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