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디데이. 9시쯤 준비를 다 끝내고 내방 창문 밖을 내다보며 크리스찬을 기다렸다. 크리스찬은 1시 이후에 보자고 했었지만 파넬에서 열리는 프랑스 마켓에 가보고싶어서 더 일찍 만나자고 했다. 창밖에 차가 보이기도 전에 집 앞에 도착했다는 크리스찬의 문자가 왔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1층까지 걸어내려갔다. 현관문을 나와보니 옆집 차고앞에 크리스찬의 민트색 폭스바겐이 보인다. 안에는 선글라스를 낀 크리스찬이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나도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바로 도도한 모습을 유지하며 차에 올라탔다.
크리스찬의 차는 20년도 더 된 것 같았다. 크리스찬은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한단다. 오래된 차, 오래된 집, 오래된 핸드폰...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멋있어보였다. 오늘 날씨가 굉장히 더웠다. 당연히 크리스찬의 차는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고 마켓에 가는 내내 바람과 내 머리카락에 따귀를 맞아야했다.
프랑스마켓은 솔직히 생각했던것보다 작았지만 나름 분위기있고 좋았다. 크리스찬은 좀 시시해 하는 것 같았지만.
한바퀴만 휙돌고 나와서 다시 차에 타려는데 마켓 입구에서 유이를 만났다. 오클랜드는 정말 좁은 것 같다. 여기서 유이를 만나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너무 반가운 마음에 크리스찬도 잊고 한참 호들갑을 떨었다.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크리스찬과 유이 일행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차차.. 미드에서보던 "This is Christian, Yui, Christian..."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서로 소개를 시켜줬어야했는데.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지고 크리스찬이 나중에 말하길, 유이보고 한국인인 줄 알았단다. 유이에게 그 얘길해줬더니 너무 좋아한다. (몇몇 일본애들은 한국인처럼 보이는 걸 칭찬으로 생각한다.) 유이와 함께 있던 일행들은 지금 일하고 있는 일본 여행사 동료직원들이라고 한다. 요즘 회사 사람들과 어울려다니느라 나에겐 연락도 없었나보다ㅋ
다시 차를 타고 크리스찬이 애초 계획했던 트레킹을 하기위해 오클랜드 북쪽으로 올라갔다. 차 안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나라의 문화에 있어서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되었다.
트레킹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나름 데이트라 치마까지 꺼내입고 전혀 트레킹 할 복장이 아니다. 크리스찬은 물이랑 간단한 스낵을 넣은 (우리 할머니도 안쓸 법한) 보따리가방을 둘러맸다. 뉴질랜드에선 트레킹할 수 있는 동산로를 Bush라고 부르는데 대충 "풀숲"이라는 의미다. 나무와 풀로 가득한 곳에 길을 터놓고 그 사이를 트레킹하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에서 말하는 등산과는 거리가 멀다. 치마에 단화까지 신고 왔지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우리는 트레킹하는 입구까지 5분정도 걸어왔다. Bush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흔들거리는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푯말과 함께 입구가 막혀있었다. 푯말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최근에 내린 비로 인해 길이 위험해 당분간 폐쇄한다는 것이다. 바로 크리스찬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민망해하는 것같기도하고 많이 아쉬워했다.
뉴질랜드에는 트레킹 할 수 있는 장소가 워낙 많고 각 트레킹 지역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사이트까지 있다고 한다. 크리스찬은 당황한 듯이 이제서야 사이트를 확인해보면서 이곳에 대한 폐쇄안내를 발견했다. ㅋㅋ
우리는 다른 트레킹 장소로 가기 전 근처 호수에 내려가 둘러 보기로 했다. 우연히 들른 호수였지만 어느 한적한 유럽의 시골마을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좀 외국에 있는 기분이든다. 호수 옆에는 오래된 교회같은 건물이 있었고 그 앞에는 여러마리의 백조, 오리, 거위들이 한데 어울려 놀고 있었다.
호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동양인 가족들과 마주쳤다. 한국어가 들렸다. 크리스찬에게 아시아 사람들 생긴 것만보고 어느나라사람인지 구분가능하냐고 물었다. 아시아 사람들에게 관심은 많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한국인 아이들은 새들을보며 거위가 오리를 잡아 먹는다는 나도 전혀 몰랐던 고급 정보를 자기들끼리 공유하고 있었다. 이 얘길 크리스찬에게 통역을 해줬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배를 잡고 웃어댄다. 동물 좋아하고 자연좋아하고..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얘기에도 즐거워하는 걸 보니 얘도 완전 키위다.
다른 트레킹 숲으로 옮겨서 드디어 트레킹을 시작했다. 태국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양 남자들이 태국에가면 정말 많은 태국인들이와서는 매춘 홍보를 한단다. 여자들 사진 쭉 보여주고 원하는 사람 고르라거나 아니면 계속 핑퐁을 외친단다. 그래서 핑퐁이 뭐냐고 물으니 너무도 적나라하게 여자 질에 탁구공같은걸 넣고 힘주어서 뽕하고 빼는 그런 퍼포먼스라고 말해줘서 솔직히 좀 놀랐다. 다른 것들도 넣고 그걸 상대편이 입으로 받기도한단다. 그런게 있다는 것 보다도 얘가 너무 이런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해서 진짜 놀랐다. 그치만 나도 듣고서 아무렇지않은듯 어제 송의 이야기를 해줬다.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영어공부하던 시절 정말 좋아했던 티셔츠가 있었는데 거기있는 동안 6개월을 내내 입었었다고. 이후 한국돌아와 짐정리하다 발견해서 문득 앞에 적힌 영어를 봤는데 “One night stand”였다고...ㅋㅋㅋㅋ 그러고나니 왜 그렇게 남자들이 접근해왔었는지 알것같다고 ㅋㅋㅋ
트레킹이 끝난 후 뭐할까 하다가 안그래도 배고파지려했는데 마침 물어본다. 버거랑 누들중에 고민하다 누들 먹으러 갔다. 점심먹고서 자기네 집에 테이블이 있는 작은 발코니가 있는데 거기가서 쉬지않겠냔다. 솔직히 뭘 믿고 이제 두번봤는데 얘네집에 따라가나 이성적으로는 고민이 됬지만 마음은 이미 오케이였고 좋다고 대답해버렸다. 뭔가 나쁜 사람 같았으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찬의 말들에선 다 진실함이 느껴져서 나쁜짓을 하지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집을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 크리스찬이 자기 집에 대한 부가 설명을 해줬다. 오래된 집인데 리모델링하는 중이라고. 자긴 오래된 집들이 좋다면서. 혹시나 집을보고 마음에 들어하지않을까하는 걱정에서였을까.
집에 들어섰더니 뭔가 휑 했다. 발코니로 가니 집 뒤쪽 큰 호수가 한눈에들어오는 전경은 정말 시원하고 멋졌다. 하루종일 정말 더웠는데 햇빛이 다 가려져있고 바람이 집안으로 술술 들어와서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알고보니 지금 2층은 아직 공사중이고 아래층이 생활하는 공간이란다.
집이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주방, 발코니, 거실, 모든게 다 널찍널찍하고 깔끔하고 시원해서 너무 좋았다.
첨에 좀 어색했다. 내가 어쩌자고 왔나 싶기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하나 싶고...
식탁에 앉아 밥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부모님 뉴질랜드 모시고 올 계획있냐고 묻길래 이혼하셔서 엄마랑만 산다는 이야기를 해버렸다. 얘도 처음만난날부터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다 해줬긴했지만 나는 좀 피하고싶었다. 나는 아무리 괜찮다지만 상대한테 어떻게 들릴지도 모를 안좋은 얘기를 굳이 하고싶지않았다.
얘는 어떻게 이렇게 부모님 이혼 사실이랑 전 여자친구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 쉽게 막 하는걸까?
밥 다 먹고서 또 잠깐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러다 송의랑 여행 계획 세운거를 이야기했더니 완전 놀라면서 자기라면 절대 그렇게 안짤거란다. 너무 힘들거라면서. 왜 자기한테 미리 안보여줬었냔다 ㅋㅋ 결국 대대적으로 수정이 들어가야할것같다.
뭐할까뭐할까 하는데 집에 갈래? 묻길래 가기싫어서 어물쩡 거렸더니 결국 술한잔을 하게됬다. 잠깐 나가서 술을 사와 쇼파에 앉아서 마셨다. 쇼파라는 것이 또 침대만큼이나 멜랑꼴리한 느낌이 있었다.
난 솔직히 뭔 일이 일어날줄알았다. 키스나 아님 못해도 손잡는거라도 ㅋ 근데 얘가 키위라그런가 왜케 소심한건지... 배려심이 많은걸까? 참 미국애들이랑은 너무나 다른것같다. 은근슬쩍 팔이나 손, 다리에 터치를 하고는 겨우 내 다리위에 팔 올려놓는 정도? 허리에도 자꾸만 손이 느껴졌는데 대담하게 허리를 감는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아주살짝 터치하고있는 정도...
그러면서 중간중간 자꾸만 내 입술로 눈동자가 내려가는게 느껴져서 그럴때마다 말문이 턱턱 막혔다.
결국 아무 일은 일이나지않고 몇시간 동안 앉아서 티비보고 이야기나누고 술마시다가 7시 좀 넘어서 일어섰다.
내 헬스장까지 데려다줬다. 마지막에 인사를 하며 내리는데 시간을 살짝 끌어야하나 고민이 됬었는데 너무나도 어색한 나머지 인사가 끝나자마자 어색한 모습으로 바로 차에서 내렸다. 인사하는동안 크리스찬의 동공에 지진나는걸 나는 분명히봤다. 그 짧은 순간 내 입술을 한 백번은 본것같다. 하... 걍 하지 뭘 망설여ㅠㅠ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내렸다.
그래도 나이가 있어서그런가 좀 철학적인 이야기나 아이들 교육, 사람 심리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눠도 말이 잘 통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사람이랑 잘되면 참 좋을것같긴하다. 잘하면 얘네집에서 같이 생활 할 수도있고 그러다 IT회사 취직해서 내가 버는 돈은 고스란히 저축. 크리스찬에게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같다.
그치만 나는 아직까지 막 엄청 끌리는 무언가를 못느꼈다. 이걸 느껴야 스킨쉽애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을텐데..ㅠ
연애할때 동양인들은 대부분 자기 부모님과 정말 많은 조언을 구하고 부모님의 의견에 많이 영향을 받는단다. 그치만 자기들은 대부분 커플 사이의 문제는 그 커플끼리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의견조율을 해서 해결하지 절대 부모님 끼어들지않는단다. 내가 싫어하는 동양 문화중 하나였는데 이야길 나누는데 속이다 시원했다.
그러면서도 드는생각이 이제껏 만났던 동양인 여자친구들 모두 이런 이유로 헤어졌겠구나싶었다. 일본인, 태국인 여자친구 모두 부모님문제로 자기네나라로 돌아갔단다.
지금까지 만난 동양인 여자친구들도 전부다 공개했다. 일본, 태국, 필리핀, 대만 총 4명. 왜 동양여자가 좋냐고 물으니 자긴 동양 여자들의 검은 머리, 얼굴 생김새 등등 외모가 좋단다. 자기 스타일이란다. 자기네 여자애들은 대부분 키랑 덩치 엄청 커서 마치 남자같은 느낌을 받는데 자기는 아담하고 대체로 날씬한 동양인이 그래서좋다고.
그치만 사야카말대로 그중에서도 독립적인 여성을 찾고있는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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