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눈을 뜨고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다. 단지 게으름인 것일까..
오늘이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날인데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우선 밥부터 먹었다. 정리하고 청소해야할게 산더미인데도 겨우겨우 폰에서 눈을 떼고 11시가 되어서야 움직였다.
원래 계획은 밤까지 집에 머무르다 마지막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치만 어제 하루를 날려버린탓에 계획도 짜야했고 또 오늘 하루도 집에만 있고싶지않았다. 그래서 시티 나갔다가 친구좀 만나고 저녁에 다시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모에게 짐을 좀 부탁했다.
짐을 엄청 버렸다. 멀쩡한 옷들도 엄청 버리고 식기류도 엄청 버렸다. 대부분이 여기서 구입한 것들이다. 앞으로는 진짜 물건을 살 때 정말 필요한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살것같다. 특히나 여행중일때에는.
한달전만해도 내 방, 카페, 친구들 등등 모든게 다 아쉽고 그리워질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었는데 정작 떠나는 당일인 오늘은 너무도 담담하다. 단지 카미가 준 노란색 꽃다발과 스마일 풍선만이 눈에 밟힐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티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건 너무 시간낭비, 돈낭비일 것 같아서 결국에 짐을 다 들고 시티로 나가기로 했다.
모와 인사를 했고 미리 불러놓은 우버를 타는데 고양이 루루가 마치 배웅을 하듯 문 옆에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고있었다.
ㅅㅎ언니가 집에 재워준다며 필요하면 말하라기에 그것만 믿고 짐 다 챙겨 나온것도 있다. 오전에 연락해놨는데 한참뒤에서야 연락이왔다. 오늘 저녁 술약속이 잡혀서 재워줄수가 없단다. 늦게 말한 내 잘못이기도했고 단순히 언니 호의였기에 충분히 이해하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나보다. 내가 귀찮아졌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짐이라도 맡겨놓고 돌아다니고싶었는데..ㅠㅠ 버리기 아까워서 뜯지도 않은 음식들도 다 챙겨와서 언니한테 줄 생각이었는데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했다.
그래도 좀 위로가 되었던 건 뜻밖에도 샤닐의 문자였다. 며칠전 교통카드 교환하고서 온라인에 등록된 정보 수정하면서 내 연락처와 생일을 알게되었다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샤닐. 오래된 친구도 아닌데 참 이런 예상치 못한 축하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보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텐데 챙겨주는게 참 고마웠다. 거기다 ㅅㅎ언니도 몇마디로 거절한 오늘의 내 제안을 샤닐이 오히려 걱정해줬다. 계획과 달리 일찍 시티로 나왔다는 말에 내일 아침까지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꺼냐며.
결국 챙겨온 음식들은 카밀라에게 연락해서 줬다. 카밀라도 알게된지 얼마 안된 친구인데 급 친해져서는 이렇게 마지막까지 얼굴을 보고가게되었다.
도서관 근처 글로리아진스에서 문닫을때까지 호주 여행계획을 짰다. 갈곳없으면 밤엔 늘 우리 카페가서 시간을 보냈었는데..ㅎㅎ 로리가 일하고 있는 지금은 가기가 좀 불편하다. 요즘 바이브에 올라오는 글을 통해보는 카페 분위기는 참 묘하다. 그들에겐 늘 이래왔던 것 같지만. 최근 새로들어온 일본 여자애 유카. 지나칠 정도로 다들 칭찬하고 유독 그 여자애만 사진찍어서 톡방에 올린다. 똑같이 최근에 들어온 Kayla, Maddy, Camila를 대하는 태도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건지는 모르겠다. 칭찬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아시안 특유의 순종적인 모습이 귀여워보여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초반에 당근을 많이 주고서 길들여지면 마음껏 부려먹으려는건지..
어쩌면 나에게도 처음엔 그런 기대를 가지고 대했던 거였을 수도있다. 그러다 내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 마지막엔 naughty 라고 불러댄 거였을 지도.
공항버스 타러가는길 마지막일수도있는 오클랜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1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처음 지슬랭과 함께 시티로 나왔던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350번이었나? 버스에 내려서 학원으로 걸어가는 길이 복잡해 정신 없이 지슬랭만 따라다녔다. 지금은 그 모든 길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오히려 그 당시의 내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네스프레소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던 지슬랭, ANZ 은행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유이와 미키, 벨라와 함께 휘젓고 다니던 H&M, 블라도 덕분에 알게된 술집 Danny Doolan... 내 눈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장소들이 영화처럼 그 당시 장면으로 그려진다.
1년동안 살면서 나와는 맞지않는 동네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었는데 막상 떠나려니 마치 고향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다. 이토록 익숙한 이 동네를 이제 다시는 못본다니...
공항은 30분만에 금방 도착했다. 아침까지 있어야할 공항엔 거의 사람 없이 휑할 줄 알았는데 가게들도 밤새 문을 열고있었고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많았다. 아무것도 모른채 어벙벙하게 입국하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출국심사까지 6시간의 대기는 생각했던 것 보다 금방 지나갔다. 햄버거도 먹고 가계부정리도하고 넷플릭스 두편에 잠깐 눈까지 붙이고나니 후딱이었다.
'뉴질랜드 생활 2018 ~ 2019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D-2 짐싸기 완료 (0) | 2021.05.23 |
---|---|
D-3 좋은 사람들 (0) | 2021.05.22 |
D-4 마무리 중 (0) | 2021.05.21 |
D-5 떠날 준비 (0) | 2021.05.20 |
D-6 행복한 삶을 사는 법 (0) | 2021.05.18 |
댓글